지난번에 봤던 비석이 뭔지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지난번 난 미처 못 봤는데 아이들이 저 비석 위에 올라 갔었나보던데
지나가던 서울 넘버차량의 아저씨가 올라가면 안된다고 야단 치길레 몹시 궁금해져 버렸다. ^^;;



이 사진은 내가 찍은건데...
마을 입구쯤에 있는 비석이다. 아마도세운 지 얼마 안되는 듯...
그런데 왜 이 비석 사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거지?
까막눈이 한자 한참 찾았잖아 우쒸~ ㅡㅡ;;
벼슬도 많이 하셨네 ^^

비명(碑名):
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 사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성균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대부
장수현 고 남원 막관 병마절제도위
조욱 신도비


조욱 선생 묘


아래는 네이버에서 발췌한 정보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평양()
 우암() ·보진재 ·용문() ·세심당()
별칭 자 경양(), 시호 문강()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용문집()》

본관 평양(). 자 경양(). 호 우암() ·보진재(?) ·용문() ·세심당(). 시호 문강(). 판관 수함(?)의 아들. 조광조() ·김식()의 문하생. 1516년(중종 11)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나 연소()하여 모면하였다. 천거로 선원전(殿) ·순릉() ·영릉()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에 은거하여 경지()를 가르쳐 용문선생으로 불렸다.

명종 때 조식() 등과 현사()로 뽑혀 내섬시주부(簿)가 되고, 장수현감()을 지냈다. 시문() ·서화()에 능하였고, 서경덕() ·이황() ·김안국() 등 당대의 명사와 교유하였다. 이조참의가 추증되고, 지평(:경기 양평)의 운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용문집()》 이 있다.







# 운계서원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지정번호 경기문화재자료 제18호
지정연도 1983년 9월 19일
소재지 경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4-2
시대 조선시대
분류 서원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씨종중에서 소유하고 있다. 덕촌리 계류()를 건너 서쪽 산 중턱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조욱(:1498∼1557)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1654년(효종 5)에 건립하였으며, 오랫동안 퇴락하여 거듭 중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욱은 19세 때 생진양과()에 급제하여 순릉()·영릉() 등의 참봉을 지냈다. 후반에는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경지()를 가르쳐 많은 학자가 모여 들어 용문선생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 묘우()에는 용문선생인 조욱 외에 5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재실 한채와 묘우뿐이며 없어져 버린 담장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평평한 대지의 좀 낮은 곳에 재실을 지었는데, 팔작지붕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운계서원이라는 제액()은 사당에 걸려 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측면 2칸 중 뒤쪽 칸은 방화벽을 두었고 각 칸은 모두 띠살문을 달아 놓았다. 기둥 머리는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촛가지의 형태가 기둥마다 달라 여러 차례 고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첨차에는 단청을 칠하였다.

유물로는 재실에 ‘운계서원원중건사실기(院院)’라는 현판 1매가 보관되어 있는데, 말미에는 ‘임오양월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다른 정보 (발췌:http://www.ypn.co.kr/myhome/main.php?mno=5613)

조욱(趙昱 1498∼1557)선생은 조선전기(朝鮮前期)의 학자·문신으로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세심당(洗心堂)·우암(愚庵)·보진제, 본관은 평양(平壤) 판관 수함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의 문인으로 중종11년(1516) 생(生)·진(進)·양시(兩試)에 합격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때 겨우 화(禍)를 면하고 준원전 참봉(濬源殿 參奉)·영능참봉(英陵參奉)을 지낸 뒤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며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져 용문선생(龍門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명종때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등과 함께 현사(賢士)로 뽑혀 내섬사주부(內贍寺主簿)가 되었고, 명종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때는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왜구(倭寇)를 선방(善防)하면서 읍민(邑民)들을 수습·교화(敎化)하는데 힘썼다.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능했으며,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김안국(金安國)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배享)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에 [용문집(龍門集)]을 남겼다. 묘역은 약50평으로 묘 우측에 묘비(墓碑), 중앙에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비문은 상단에 전자(篆字)로 [유명조선국용문조선생묘비명병서(有明朝鮮國龍門趙先生墓碑銘幷序)]라고 했다. 비명(碑銘)은 조익(趙翼)이 짓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이징하(李徵夏)가 전(篆)했다. 말미(末尾)에 [준오계을축사헌부대사헌김진상추기 시년시월일입(浚五季乙丑司憲府大司憲金鎭商追記 是年十月日立)]이란 음각으로 보아 묘갈(墓碣)은 영조21년(1745)에 건립했음을 알수 있다. 비신은 높이 155㎝, 폭 58㎝, 두께 31㎝ 의 규모이다.


# 간략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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