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 (南陽洪氏) 토홍계

1> 시조 : 홍선행[洪先幸]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과 화성군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의 당성군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 수주(수원)와 인주(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에 남양부가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토홍계(土洪系)의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의 옛지명)에 세거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에 정착 세거하며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선행(先幸)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전한다.

 남양홍씨의 토홍계는 조선조에서 크게 명성를 날렸는데, 익생(益生)은 문과에 급제한 후
목사를 거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귀연(貴演)은 대호군을, 식(湜)은 검열을 거쳐
이조좌랑, 정언을 지냈다.
 특히 언필(彦弼)은 중종때 영의정을 지내고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며,
아들 섬(暹)은 명종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후 선조때 영의정을 세차례나 중임했을 뿐아니라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자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편 선조때 홍주목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정난일등공신에 책록되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 가신(可臣)은 형조판서를 거쳐 광해군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우참찬 담(曇)의 아들 종록(宗祿)은 1589년(선조 22) 모역(謀逆)한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한때 유배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때 류성룡의 종사관으로 공을세워 암행어사와
조도사(調度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그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를 지낸 진도(振道)와 한성좌윤을
역임하고 숙종때 이조판서에 추증된 진문(振文) 형제가 이름났으며, 직제학 종록(宗祿)의 아들
헌(憲)은 광해군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숙종때 문과에 올라 병조참판을 지내고 남계군에 습봉(襲封)된 [숙]은 아들 형제와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맏아들 봉조(鳳祚)는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치고 대사성에 이어
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둘째 용조(龍祚)는 충주목사와 회양,
삼화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한편 자(梓)귀조(龜祚)의 아들로 한성부 좌윤과 대사헌을 역임하여, 나주목사 [역],
지중추부사 억(憶)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실학자로 유명한 대용(大容)은 군국(軍國)과
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여 종래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부정한 기화설(氣化說)을
주장했으며,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했고 신분제도의 타파를 부르짖었다.

 한말에 와서는 의사(義士) 치유(致裕)와 우부승지 필유(必裕)가 이름났고,
항일투사 사구(思九)는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의병에 가담하여 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유림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가문을 더욱 빛냈다

3> 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상성리

경기도 김포군 금단면 금곡리

충북 중원군 노은면 수용리

충남 부여군 양화면 벽용리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충북 중원군 양성면 용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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