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전사? 영웅은 가고 논쟁만 남았다


[조선일보 신동흔, 유석재 기자]

영웅은 가고, 이제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이 남았다.

불멸의 이순신(李舜臣)’이 28일 밤 104회 방영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장면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패퇴하는 왜군을 추적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다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는 장면. 이를 놓고 자살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하다.

드라마의 마지막.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벗고 붉은 색 융복만을 입은 채 적진을 향해 돌진하다 조총에 맞고 눈을 감으며 의식을 잃어간다. 극중에서 “저 바다는 나의 피도 원할 것”이라든지, “적을 없앨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대사 등이 시청자에게 자살을 암시한다.

과연 이순신은 자살한 것일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이미 임진왜란 직후부터 제기됐다. 17세기의 문신 이민서는 ‘
김충장공유사’에서 “이순신은 한참 싸울 때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월탄 박종화의 장편소설 ‘임진왜란’(1957)도 이순신의 자살로 끝을 맺고 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갑옷도 입지 않고 전투에 나갔다는 기록 ▲전투 직전 ‘이 원수를 없앤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는 기록 등을 인용한다.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뿐 아니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10여명의 우리측 장수들이 전사했다. 이것이 7년간의 임진왜란 해전 중 조선 장수 전사자의 35%에 달할만큼 많다는 점도 ‘자살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장수들이 일부러 적의 정조준 사거리까지 근접해 싸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은둔설’이 제기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노량해전서 전사한 것으로 해 놓고 몰래 빠져나가 숨어 살았다는 얘기다. ▲‘말을 풀어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는 이순신의 시 ▲이순신의 전사 당시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등 3명뿐이었다는 것 ▲전사 16년 뒤인 1614년에 묘지가 이장됐는데 이때 실제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이 그 근거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선 자살설에 대해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무리한 추측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이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무시하고 자살설을 개진하기에는 무리라는 것. 노영구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일부에서 ‘갑옷을 벗었다’는 표현은 실제로 갑옷을 벗었다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앞서 싸웠다’는 관용적 표현이고, 당시 갑옷 자체도 방탄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
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이순신과 선조와의 갈등은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씨와 함께 TV 드라마의 원작자인 소설가 김탁환씨도 “내 소설은 충무공이 총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만 그렸을 뿐”이라며 “자살이냐 전사냐 양자택일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데는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 명량해전과는 달리 우리측 함선이 적지 않았는데도 함대 뒤쪽에서 전투를 지휘해야 할 사령관이 선두에 나서 싸웠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연출자인 이성주 PD는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팩트’만은 흔들리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 PD는 “자살 여부에 대해 과도한 논쟁이 일고 있는 것 같다”며 “우리는 자살보다 마지막까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싸웠고, 어떻게 조선 백성과 부하 장수들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신동흔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dhshin.chosun.com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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