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써야 할 위패 내용이다.
아버지께서 적어 주셨다... ㅡㅡ;;

 

(아버지)
傳佛心燈 扶宗樹敎 一國名現 鶴庵堂(慧岩堂) 大禪師 之龕
전불심등 부종수교 일국명현 학암당(혜암당) 대선사 지감


(어머니)
顯?孺人 漆原諸氏 神位
현비유인 칠원제씨 신위
-"비"자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女比 : 죽은 어미 비 - 女比 두 글자를 붙혀 쓰면 된다.)


(일반인)
顯考學生 府君 神位
현고학생 부군 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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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아들에게 ###

1.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하고는 동업하지 말거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2.어려서부터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 아이들을 많이 만들어 놓거라.
→그 중에 하나 둘은 안그랬다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예쁜 아가씨로 자랄 것이다.

3.목욕할 때에는 다리 사이와 겨드랑이를 깨끗이 씻거라.
→치질과 냄새로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4.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거든 주방장에게 간단한 메모로 칭찬을 전해라.
→주방장은 자기 직업을 행복해할 것이고 너는 항상 좋은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5.좋은 글을 만나거든 반드시 추천을 하거라.
→너도 행복하고 세상도 행복해진다.

6.여자아이들에게 짓궂게 하지 말거라.
→신사는 어린 여자나 나이든 여자나 다 좋아한단다.

7.양치질을 거르면 안된다. 하지만 빡빡 닦지 말거라.
→평생 즐거움의 반은 먹는 것에 있단다.

8.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거라.
→친구가 너를 어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아내가 즐거워할 것이다.

9.하느님을 찾아 보거라.
→만약 시간의 역사(호킨스), 노자(김용옥 해설), 요한복음(요한)을 이해한다면
서른 살을 넘어서면 스스로 서게 될 것이다.

10.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너무 예의바른 사람을 집에 초대하지 말거라.
→ 굳이 일부러 피곤함을 만들 필요는 없단다.

11.똥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거라.
→ 일주일만 억지로 해보면 평생 배 속이 편하고 밖에 나가 창피 당하는 일이 없다.

12.가까운 친구라도 남의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속을 보이지 마라.
→ 그 사람이 바로 내 흉을 보고 다닌 사람이다.

13.나이 들어가는 것도 청춘만큼이나 재미있단다. 그러니 겁먹지 말거라.
(편집자 주: 유학 늦는다고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 사실 청춘은 청춘 그 자체 빼고는 다 별거 아니란다.

14.밥을 먹고 난 후에는 빈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어주거라.
→ 엄마는 기분이 좋아지고 여자친구 엄마는 널 사위로 볼 것이며
네 아내는 행복해할 것이다.

15.양말은 반드시 펴서 세탁기에 넣어라.
→ 소파 밑에서 도너츠가 된 양말을 흔드는 사나운 아내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16.네가 지금 하는 결정이 당장 행복한 것인지 앞으로도 행복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 법과 도덕을 지키는 것은 막상 해보면 그게 더 편하단다.

17.돈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거라.
→ 돈에 눈이 멀어진다.

18.돈을 너무 멀리 하지 말거라.
→ 너의 처자식이 다른 이에게 천대받는다.
→ 돈이 모자라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해서 사용해라.

19.너는 항상 내 아내를 사랑해라.
→ 그러면 네 아내가 내 아내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20.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으면 최소한 세 명의 의사 진단을 받아라.
→ 생명에 관한 문제에 게으르거나 돈을 절약할 생각은 말아라.

21.5년 이상 쓸 물건이라면 너의 경제능력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사거라.
→ 결과적으로 그것이 절약하는 것이다.

22.베개와 침대와 이불은 가장 좋은 것을 사거라.
→ 숙면은 숙변과 더불어 건강에 가장 중요한 문제다.

23.너의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친구가 되거라.
→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것 같으면 아버지를 택해라.
→ 친구는 너 말고도 많겠지만 아버지는 너 하나이기 때문이다.

24.오줌을 눌 때에는 바짝 다가서거라.
→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될 것이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25.연락이 거의 없던 이가 찾아와 친한 척하면 돈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 분명하게 `노`라고 말해라. 돈도 잃고 마음도 상한다.

26.친구가 돈이 필요하다면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될 한도 내에서 모든 것을 다 해줘라.
→ 그러나 먼저 네 형제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해줬나 생각하거라.

27.네 자녀를 키우면서 효도를 기대하지 말아라.
→ 나도 너를 키우며, 너 웃으며 자란 모습으로 벌써 다 받았다

28.밥 먹을때 걸려오는 전화를 굳이 받지 말아라.
→ 내 평생 밥먹다가 받은 전화중에 수저를 놓을 만큼 중요한 전화는 없었다.

29.자신있는 요리를 세가지는 만들어 놓아라.
→ 그것만으로도 너는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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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 병철
 소악

洪 在 奎 홍재규
金 천 임
諸 淑 禮 제숙례

洪 鐘 元 홍종원
曺 美 京 조미경
洪 瑩 敏 홍영민
洪 貞 旻 홍정민
洪 相 旻 홍상민

洪 종 욱
洪 순 현
洪 예 진

南陽 洪 鐘 燮 홍종섭
新昌 孟 賢 貞 맹현정
南陽 洪 淳 贊 홍순찬
南陽 洪 淳 敏 홍순민

南陽 洪 琇 淨 홍수정
박형준
박서영

류 지 영
류 연 아

孟 白 永 맹백영
李 福 順 이복순

孟 賢 男 맹현남
李 大 基 이대기
李 鍾 範 이종범
 이종원

孟 成 元 맹성원
천보성
천현준
천현지
천현우

孟 成 胤 맹성윤
류병현
류효리
류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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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南陽 洪氏) 중랑장파(中郞將派)

남양홍씨중랑장파종중 홈페이지 http://www.namyanghong.com/

시조(始祖) : 당홍(唐洪)계 - 홍은열(洪殷悅)

당홍 32대 南陽 洪 鐘 燮 홍종섭
당홍 33대 南陽 洪 淳 贊 홍순찬
당홍 33대 南陽 洪 淳 敏 홍순민

신창 맹씨(新昌 孟氏) 호군공파

新昌 孟 賢 貞 맹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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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 이씨 (碧珍李氏) 벽진이씨 홈으로

1> 시조 : 이총언[李총言]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벽진(碧珍)은 경상북도 성주군의 통일신라때 행정구역명이다.
신라때 본피현이라 하다가 757년에 신안현으로 개칭하였고, 통일신라때벽진군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 성주군 벽진면으로 남아있다.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시조 이총언은 신라말에 벽진군 태수를 지내고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으로 벽진장군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총언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벽진으로 삼게 되었다.

벽진장군 총언의 아들 영(永)이 대제학과 지경산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
추밀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시조 총언의 10세손으로 공부사를 지낸 옹(雍)의 맏아들
견간(堅幹)이 고려 3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산꽃의 말(山花之語)>이란 시로
이름을 떨쳐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리웠다.
한편 병조 판서 심지(審之)의 아들 맹전(孟專)은 승문원 정자와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거창 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 강정리로 돌아가 은거한 후 청맹(靑盲)으로 행세
하면서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손님을 거절하교 두문불출하기를 30년이나 계속했다.

맹전의 아우 계전(季專)은 성종때 경기 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참판 신지(愼之)의 손자 승언(承彦)은 성종때 한성 참군을 지냈다.
현령 덕손(德孫)의아들 약동(約東)은 사헌부 감찰과 지평, 성균관 직강 등을 지내고
제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제주를 떠나오는 뱃속에서 뱃사람들이 금으로 만든
갑옷을 그에게 바쳤다. 섬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배를 타기 전에는 받지 않을 것
같아 뱃사람들에게 맡겨 전해주도록 한 것이었다.
약동은 그 금갑옷을 받아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 금갑옷이 던져진 바다 여울목을
투갑연(投甲淵)이라 하며 지금도 그곳 섬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호조참판 의 아들 후경(厚慶)은 학행이 뛰어나 영남에서 이름난 유학자로 추앙을 받았으며,
희선(喜善)의 아들 상길(尙吉)은 절행으로 유명했다. 상길은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으며, 회양부사와 안주목사를 지냈고 후에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밖의 인물로는 구한말에 척화양이지론(斥和攘夷之論)의 국수적 이론으로 가장 의로운 인맥을
형성한 화서 항로(恒老)가 유명했다.
3세에 [천자문(千字文)], 6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 12세에 [상서(尙書)]를 읽었다는
거학 항로는 1809년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했다

화서는 전라 도사와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고 공조참판에 승진, 경연관이 되었으나,
당시의 실세 대원군의 실정을 반대하여 노여움을 샀다.
그후다섯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는사직상소에서 시폐의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자로서 조선 말기 성리학의 결론을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하게 상소했던 우면(愚冕)과,
대구 고등검사장으로 검찰행정의 기초 확립에 이바지했던 우익(愚益),
대구대학장을 지낸 우창(愚昶), 자모의 병환을단지주혈(斷指注血)로 간병했던 종기(宗基)
등과 더불어 의절과 학맥의 전통 가문인 벽진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벽진이씨(碧珍李氏)는 남한에 총 19,807가구,
80,6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사율리

경북 영천군, 청송군, 구미시 일원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경남 창녕군, 밀양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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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 맹씨(新昌孟氏) 맹씨행단 홈으로 이동

1> 시조 : 맹 가[孟 軻 : 맹자]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신창(新昌)은 충남 아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을 신라 경덕왕이
기량현으로 고치고 고려초에는 신창현으로 그후 조선조에서는 온창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에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에 연원을 두고, 춘추시대 제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가 맹손(孟孫) 이라서 맹(孟)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하며,
맹자(孟子)로부터 세계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경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어릴 때 현모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나라
한림원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은 신창을 비롯하여 온양, 파주, 양주, 청주,안읍, 천안, 전주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때 예부시랑을 거쳐 예부전서에 오른 맹의(孟義)를 1세조
계대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충선왕때 신창백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신창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1세조 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에 이부상서와
순창군수를 역임했고, 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때 한림어사, 한성윤 등을 지내며
공양왕때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말의 명장 최영의 손녀사위 이기도한 그는 청백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를 철저히
배제했고, 나들이때는 소를타고나가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갈때에 관가에 들리지 않고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하니 두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밑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

[연려실기술] [세종조상신편]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있는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 시험에 응하러 가는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사람이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말하기를"죽었지당"하니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까닭을 애기하자 모든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남긴것이 한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희 정승과 함께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신창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 당시 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남 아산군 배방면 중리, 수철리, 휴대리

함남 북청군 청해면 어포리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태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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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홍씨 (洪州 洪氏)

1> 시조 : 홍 규[洪 規]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홍주(洪州)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운주인데
고려 성종때 단련사를 두었다가 1012년 지홍주사로 고치고 후에 홍주로 개칭되었다.
지금은 홍성군에 속한 홍성면으로 남아있다.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 홍규(洪規)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칠때 공을세워
삼한삼중대광 벽상익찬공신(森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으로 해풍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해풍에 세거하여 홍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규(規)의 아들 유후(儒厚)는 태사익찬공신에 오르고, 손자 욱(旭)은 문하시중 평장사로
안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규(規)의 증손 공좌(功佐)가 1017년(고려 현종 8) 문과에 급제하고
정종이 즉위하자 좌습유 지제고를 지낸 후 문종때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고,
공좌(功佐)의 손자 민구(敏求)는 나이 일곱에 이미 시서(詩書)에 능통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내 명문인 홍주홍씨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다.

고려조에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한 기교(箕敎)는 이조전서를 지낸 의 아들로
대제학을 역임한 위(僞)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외 이조참의 관(灌)과 부호군 상하(祥夏), 중헌(重憲) 등이 유명했으며, 예조참판 재봉(在鳳)
군수를 지낸 희준(喜俊)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주홍씨(洪州洪氏)는 남한에 총 392가구,
1,7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은산리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송전리

황해도 벽성군 금산면 추정리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

전북 익산군 금마면 신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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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홍씨 (豊山 洪氏)

1> 시조 : 홍지경[洪之慶]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안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하지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영안으로 고쳐서 예천군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때 풍산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은 안동군 풍산읍으로 남아있다.

 풍산홍씨(豊山洪氏)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을
역임한 후 풍산에 정착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며
고려말에서 조선 헌종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세도가문으로 명성을 날렸다.
지경의 아들 홍애(洪崖) 간(侃)은 첨의사인(僉議舍人)과 지제고(知制誥)에 올랐으나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바른말을 하여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졸(卒)하였다.

 3세 유(侑)는 진현관, 보문각, 춘추관대제학에 올랐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5세 구(龜)는 승의교위 낭장을 지냈으며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으로 하향 도중에 지금의 고양군 벽제 성석리에 정착하여 그후로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6세 만은(萬隱) 재(載)는 소윤(少尹), 군사(郡事), 양관대제학을 역임했으며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12세 응복(應福)의 아들 천경(千璟)은 한림(翰林)에 재직시 김연흥의 옥사와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뒤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올랐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 수(脩)의 아들 모당(慕堂) 이상(履祥)은 경상, 경기관찰사,
개성유수와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한사람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에 충실한 [이상]은 소학(小學)을
학문과 교육의 기본으로 삼아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가례(家禮)대로 실행하였으며,
[걸군소(乞郡疎)]에 나타나듯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슬하에 여섯아들과 열한명의 손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하였다.

 장자인 방(露)은 도관찰사와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지계예설(芝溪禮設)과 선조에 제사하는 의식과 법도를 저술하였다.
 둘째 아들 립(露)은 가선대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셋째 집(露)은 사헌부장령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넷째 영(霙)은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고 인조23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다섯째 박(露)은 수운판관을 역임,
여섯째 탁(露)은 통정대부 남원부사로 영국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되어 풍산홍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숙종때 학자로 이름난 예조참의 주국(柱國)의 아들 만선(萬選)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행실이 근엄하고 인격이 고매하여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 세인들은 그를 (完人)이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農藝), 의약(醫藥), 구황(救荒)에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사상에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 서유구 등의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영조때 판돈령부사에 오른 만조(萬朝)는 일찍이 대사간,
좌빈객 등을 거쳐 7도관찰사와 2도안찰사를 역임, 우참찬, 형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때 대사간을 지낸 만용(萬容)은 영안위 주원(柱元)의 아들로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1754년(영조31)에 예조판서가 된 상한(象漢)은 병조판서, 판돈령부사를 거쳐 1759년
판의금부사로서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 봉한(鳳漢)은 영조때 예조판서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로, 그의딸이 혜경궁 홍씨로
유명하며, 영조때에 많은 업적을 남긴후 조선후기의 문화 부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동생 인한(麟漢)도 형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정조때 대제학을 지낸 국영(國英)과 지돈령부사 현주(顯周)가 뛰어났고,
우부승지 인모의 아들 석주(奭周)는 특히 성리학에 밝았고 문장에 있어서 [십대가(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한말에 와서는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범식(範植)과,
독립운동에 몸바친 충희(忠熹)가 뛰어났고, 진(震)은 통일 독립정부수립을 위한 비상국민의회
의장으로 추대되어 명망높은 풍산홍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홍씨(豊山洪氏)는 남한에 총 8,323가구,
35,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북 중원군 노은면 일원

전남 나주군 일원

충남 천원군 일원

경기도 고양군 일원

경남 진양군 일원

경남 양산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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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부계홍씨 (缶林,缶溪洪氏) 부림홍씨 홈으로

1> 시조 : 홍 란[洪鸞]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부계(缶溪)는 경상북도 군위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삼국 시대의 부림현인데
고려 초에 부계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에 속하였다가 후에 선주(선산)에 이속하고
공양왕때 의흥에 속하였다. 지금은 군위군에 속한 부계면으로 남아있다.
 
부림홍씨(缶林洪氏)는 지명에 의하여 부계홍씨라고도 한다
시조는 고려조의 재상을 지낸 홍난(洪 鸞)을 시조로 하고 그의 6세손 홍좌(洪 佐)
1세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조에서 직장(直長), 동정(同正)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누대에 거쳐 토착 세거 해온
부계(缶溪)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여 오고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 성종때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귀달(貴達)이 유명했다.
  그는 세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하자 춘추관(春秋官)의 편수관(篇首官)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직제학, 도승지 등을 거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依註)]를 개정했다. 그후 대사성, 대제학,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연산군의 난정을 직간(直諫)하다가 좌천되었으며 자기의 손녀(언국의 딸)를 궁중에 들여
보내라는 왕명을 듣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살해되었다.
  특히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원만한 인품으로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차남 언충(彦忠)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박사(博士) 등을 역임하고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진안에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직강(直講)에
복직되었으며, 글씨와 문장에 뛰어나 정순부, 이택지, 박중열 등과 더불어 당대의
[문장4걸(文章四傑)]로 일컬어왔다.

 학자 언국(彦國)은 귀달의 세째 아들로, 문장과 지조가 뛰어나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딸의 미모를 탐한 연산군이 그의 딸을 입궁 시키라고 강요했으나 거절하여 거제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심했다.

 그외 인조때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간을 지낸 호(鎬)와,
사간(司諫)을 지낸 그의 아들 여하(汝河)가 이름났으며,
현감(縣監)을 역임한 언승(彦昇)복창(復昌)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림홍씨(缶林洪氏)는 남한에 총914가구,
3,6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 남산동

경북 문경군 영순면 율곡동

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 매곡동

경북 문경군 호계면 호계리

경북 군위군 부계면 고곡동

대구직할시 일원

경북 예천군 풍양면 와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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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 (南陽洪氏) 토홍계

1> 시조 : 홍선행[洪先幸]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과 화성군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의 당성군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 수주(수원)와 인주(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에 남양부가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토홍계(土洪系)의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의 옛지명)에 세거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후손들이 당성에 정착 세거하며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므로 선행(先幸)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전한다.

 남양홍씨의 토홍계는 조선조에서 크게 명성를 날렸는데, 익생(益生)은 문과에 급제한 후
목사를 거쳐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귀연(貴演)은 대호군을, 식(湜)은 검열을 거쳐
이조좌랑, 정언을 지냈다.
 특히 언필(彦弼)은 중종때 영의정을 지내고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며,
아들 섬(暹)은 명종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후 선조때 영의정을 세차례나 중임했을 뿐아니라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자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편 선조때 홍주목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정난일등공신에 책록되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 가신(可臣)은 형조판서를 거쳐 광해군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우참찬 담(曇)의 아들 종록(宗祿)은 1589년(선조 22) 모역(謀逆)한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한때 유배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때 류성룡의 종사관으로 공을세워 암행어사와
조도사(調度使)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그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를 지낸 진도(振道)와 한성좌윤을
역임하고 숙종때 이조판서에 추증된 진문(振文) 형제가 이름났으며, 직제학 종록(宗祿)의 아들
헌(憲)은 광해군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숙종때 문과에 올라 병조참판을 지내고 남계군에 습봉(襲封)된 [숙]은 아들 형제와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맏아들 봉조(鳳祚)는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치고 대사성에 이어
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둘째 용조(龍祚)는 충주목사와 회양,
삼화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한편 자(梓)귀조(龜祚)의 아들로 한성부 좌윤과 대사헌을 역임하여, 나주목사 [역],
지중추부사 억(憶)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실학자로 유명한 대용(大容)은 군국(軍國)과
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여 종래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부정한 기화설(氣化說)을
주장했으며,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했고 신분제도의 타파를 부르짖었다.

 한말에 와서는 의사(義士) 치유(致裕)와 우부승지 필유(必裕)가 이름났고,
항일투사 사구(思九)는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의병에 가담하여 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유림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가문을 더욱 빛냈다

3> 집성촌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상성리

경기도 김포군 금단면 금곡리

충북 중원군 노은면 수용리

충남 부여군 양화면 벽용리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충북 중원군 양성면 용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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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南陽洪氏) 당홍계
남양홍씨 남양홍씨 양평종친회 홈으로

1> 시조 : 홍은열[洪殷悅]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과 화성군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의 당성군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 수주(수원)와 인주(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에 남양부가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에 합하였다. 그후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으로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홍씨(洪氏)는 당나라 태종이 여덟 명의 학사를 문화사절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때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문무왕때
당성백(伯)에 봉해지고, 신무왕이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은 당성후를
삼았다고 한다.
그후 당성의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고려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지낸 은열(殷悅)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로는 은열(殷悅)을 6세손 관(灌)이 고려에서 예부상서,
수사공 상서 좌복야에 이르렀으며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의 난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신라 김생의 필법을 본받은 당대의 명필로
보문각(寶文閣), 청연각(淸燕閣)의 글씨를 비롯한 보전화루(寶殿 樓)의 병풍과 편액을 썼다.

충렬왕때 지밀직사사에 오른 자번(子藩)은 지첨의부사, 첨의찬성사를 역임하고
첨의중찬으로 치사(致仕)했다.
충선왕때 판삼사(判三司)를 지낸 규(圭)진(縉)의 아들로 추성진력정안공신으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찬성사 선(詵)은 충숙왕때 강녕군에 봉군되어,
만호(萬戶)를 지낸 아들 수(綏)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성계를 도와 개국이등공신으로 남양군에 봉해진 길민(吉旼)과,
세종때 전주부윤을 거쳐 판서를 역임한 여방(汝方)이 뛰어났다.
윤성(允成)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고, 예조참의에 올라 좌익삼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되어 인산군에 봉해졌다. 1460년 모련위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우의정이 되었으며 예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좌리일등공신이 되었다.

유손(裕孫)순치(馴致)의 아들로서 일찍이 당대의 석학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문장에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어 '청담파(淸談派)'로
일컬어졌다. 한편 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된 인우(仁祐)와 당성부원군에 추봉된 세공(世恭)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부 우윤에 오른 적(迪)과 함께 가문을 빛냈으며, 우경(友敬)은 선조의 딸
정인옹주와 혼인하여 당성위(唐城尉)에 봉해지고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다.

그외 대사간(大司諫) 천민(天民)의 아들 서봉(瑞鳳)은 인조반정에 공을세워 병조참의가 되고
정사삼등공신으로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그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40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문장과 시(詩)에 능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생전에 그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잡혀 갈때 그 슬픈 민족적 심경을 노래한 시조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이별(離別)하든 날에 피눈물이 난둥만둥
압록강(鴨綠江) 내린 물이 프른 빛이 전혀 없네
배위에 하얗게 센 사공(沙工)이 처음 본다 하더라.

그의 아들 명일(命一)은 인조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을 지낸뒤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장령(掌令), 필선(弼善)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영안군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서익(瑞翼)의 아들 명하(命夏)는 현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관찰사 처후(處厚)의 아들 수헌(受 )은 숙종때 이조판서와 좌참찬을 역임하여 우승지,
우서(禹瑞), 한성부 판윤, 호인(好人), 대사헌(大司憲), 계적(啓迪), 호군(護軍)을 지낸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순조때 좌찬성 재철(在喆), 대사헌 직필(直弼) 등과 영의정 순목(淳穆)은 한말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특히 순목의 아들 영식(英植)은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만식(萬植)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일지사 재학(在學)은 독립운동으로 명성을 날린 기조(基兆), 범도(範圖), 병기(秉箕),
성익(成益), 승로(承魯), 식(植), 원식(元植), 학순(學淳) 등과 함께 선조들의 훌륭한 위업을
본받아 조국의 광복과 자유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명문의 전통을 후세에 전했다

3> 집성촌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

강원도 명주군 연곡면 동덕리

충남 연기군 서면 신대리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석천리

함남 홍성군 홍원읍 내원리

평북 정주군 말산면 신오동

평남 강동군 봉진면 봉당리

평북 삭주군 남서면 창신동

 

[UPDATE 2018.02.25]

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294160256&qb=7ZmN7JSoIOuzuOq0g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Tp58lwpVuEKssci09VZssssst%2Bl-473364&sid=0X%2BS69ITzuHf3kzkrZ3y0w%3D%3D


남양 홍씨(南陽 洪氏)에 대()하여

 

1. 남양 홍씨(南陽 洪氏) 시조(始祖) : 홍선행(洪先幸)

2. 남양 홍씨(南陽 洪氏) 유래(由來) :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에 대대(代代)로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高麗)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으며 가문(家門)의 기틀을 잡아 가세(家世)를 크게 번창(繁昌)시켰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하였다.

 

 

3.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파(唐洪系派) 중시조(中始祖) :홍은열(洪殷悅)

 

당홍계(唐洪系)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시조(始祖)는 홍은열(洪殷悅)입니다.

홍은열(洪殷悅)의 선조(先祖)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高句麗) 27대 왕()인 영류왕(營留王) 때 중국(中國) ()나라에서 8학사(學士)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선시조(先始祖)가 다른 당홍계(唐洪系)와 토홍계(土洪系) 두 계보(系譜)가 있다. 당홍계(唐洪系)의 선()시조(始祖)는 중국(中國) ()나라 사람인 홍천하(洪天河)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 때 당()나라 태종(太宗)이 문화(文化) 사절(使節) 8명의 학사(學士)를 고구려(高句麗)에 파견(派遣)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홍천하(洪天河)이다. 그는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와 유학(留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開拓)하였으며 그 공로(功勞)로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당성(唐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정착(定着)하였다. 그 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남양(南陽)으로 바뀌었는데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수원시(水原市)와 화성시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地名)이다. 이때부터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는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홍은열(洪殷悅) 1세조(世祖) 조상(祖上)으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홍은열(洪殷悅)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하는데 크게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太祖)로부터 직접(直接) 은열(殷悅)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으며 정일품(正一品)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자리에 올랐다.

 

삼국통일(三國統一) 뒤인 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留學)의 발전(發展)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남양)'에 봉()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본관(本貫)을 당성(唐城)으로 하였습니다. “당성(唐城)”이후(以後) '남양(南陽)'으로 지명(地名)이 바뀌어 지금은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인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中始祖), 1세 조상(祖上)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습니다.

 

 

4. 남양 홍씨(南陽 洪氏) 토홍계(土洪系)

 

시조(始祖)는 홍선행(洪先幸)

고려 중엽에 금오위별장동정을 지내셨다. 남양의 토성이라고 하나 당홍계와의 관계가 국사나 고적에 모두 나타나 있지 않아 상고 할 길이 없다 토홍계(土洪系)는 홍선행대부터 벌족의 기틀을 잡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관향을 남양으로 계대 하여 오고 있다.

 

파명으로는

문희공파, 정효공파, 참의공파, 주부공파, 대호군공파 등이 있습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토홍계(土洪系)는 경기도(京畿道) 남양(南陽)에서 대대(大帶)로 살아온 토착(土着) 성씨(姓氏)이다. 시조 홍선행(洪先幸)이 고려시대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내면서 그를 시조로 삼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역사(歷史) 시조(始祖) 홍선행(洪先幸)은 남양에 대대(代代)로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 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으며 가문(家門)의 기틀을 잡아 가세를 크게 번창시켰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시조(始祖)의 묘()는 경기도(京畿道) 화성시 송산면 천등리(등굴)에 있었으나 없어져서 비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 1일에 제향한다.

 

분파(分派) 홍선행(洪先幸) 9~12대손에서 문희공파(文僖公派정효공파(貞孝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5파로 나뉜다.

 

인물(人物) 남양 홍씨 토홍계(土洪系)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상신(上臣) 2, 문형 1, 청백리(淸白吏) 3,부마 1, 공신(功臣) 3명 등을 배출(輩出)하였다.

 

문희공파(文僖公派)에서는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이 중종(中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홍섬(洪暹) 역시 선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차례나 중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홍언필(洪彦弼)의 부인(夫人) 여산 송씨는 중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송질(宋軼)의 딸이다.

 

정효공파(貞孝公派)의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은 홍언필(洪彦弼)의 조카인데,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선조(先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역시(亦是)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대호군공파에서는 홍숙(洪淑)이 병조판서(兵曹判書좌찬성 등()을 역임(歷任)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을 주창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그의 현손(玄孫)이다.

 

 

5. 남양 홍씨(南陽 洪氏) 본관(本貫地) 연혁(沿革)

 

본관소재지 :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 일원(一圓)을 포함한 지역(地域)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당항성(唐項城)이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고, 쌍부(雙阜정송(貞松안양(安陽) ()을 관할(管轄)하였다. 822(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 水原)에 병합(倂合)되었으나 829(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設置)하면서 분리(分離)되었다. 940(고려 태조 23)에 군()이 되었다가, 1018(현종 9)에 수주(水州: 水原)의 관할(管轄)에 들었고, ()에 인주(仁州: 仁川)의 영현이 되었다. 1172(명종 2) 독립(獨立)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재양현(載陽縣: 安陽縣)을 관할(管轄)하였다. 1290(충렬왕 16)에 익주(益州), 후에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昇格)되다가 1310(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로 강등(降等)되었다. 1413(태종 13)에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가 되었다가 잠시 현()으로 강등(降等)되기도 하였다. 1792(정조 16)에 수원진을 남양(南陽)으로 옮겨 설치(設置)하였고 별호(別號)는 영제(寧堤과포(戈浦)라 하였다. 1895(고종 32)에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인천부 남양군(南陽郡)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京畿道) 남양군(南陽郡)이 되었다가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수원(水原)의 두입지(斗入地)인 팔탄·분향·장안·초장·압정·오정 등 6개면이 남양군(南陽郡)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남양군(南陽郡)이 폐지(廢地)되어 수원군(水原郡)에 병합(倂合)되었다. 이때 일부(一部) ()이 은덕·쌍수·마도·송산·서신·비봉면으로 통합(統合)되고 수원군(水原郡)에서 편입(編入)했던 6개면은 팔탄면·장안면·우정면으로 통합(統合)되어 다시 수원군(水原郡)에 편입(編入)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昇格)되고, 1949년 수원군(水原郡)을 분할(分割)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昇格)시키고 수원군(水原郡)을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改稱)하였다. 1963년 주변의 20개 리()를 편입(編入)하였으며, 1967 6월 서울시에 있던 경기도청(京畿道廳)이 수원시(水原市)로 이전(移轉)되었다. 1983년 전국(全國)행정구역(行政區域) 조정(調定)으로 용인시 수지면(水枝面) 하리(下里이의리(二儀里) 2개 리()가 편입(編入)되었다. 1987년 화성군(華城郡) 매송면(梅松面) 금곡리(金谷里호매실리(好梅實里)가 편입(編入)되었다. 1988 7월 장안구·권선구 2개 구가 신설되었고, 1993년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권선구에 입북동·당수동을, 팔달구에 영통동이 각각 신설되었다. 1995년 권선구 곡선동이 권선동과 곡선동으로 나뉘고, 화성군(華城郡) 태안읍 신리와 망포리 일원이 팔달구 매탄3동에 편입(編入)되었다. 2003 11월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2004년 현재 4 4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6. 남양 홍씨(南陽 洪氏) 인물(人物)

 

역대 중요 인물(장관급, 시호를 받은 분)

 

  : 고려 시호 충평, 수사공상서좌복야

홍녹주 : 고려 시호 희순, 우복야

홍자번 : 고려 시호 충정, 도첨의

홍 규 : 고려 시호 광정, 판삼사사

홍 선 : 고려 시호 관정, 찬성사

홍 융 : 고려 시호 장간, 삼사사

홍 빈 : 고려 시호 강경, 정방제조

홍언박 : 고려 시호 문정, 문하시중

홍길민 : 조선 시호 문경, 중추원사

홍여방 : 조선 시호 문량, 판서

홍윤성 : 조선 시호 위평, 영의정

홍달손 : 조선 시호 안무, 좌의정

홍경주 : 조선 시호 도열, 이조판서

홍성민 : 조선 시호 문정, 대제학

홍여순 : 조선 병조판서

홍천민 : 조선 대사간

홍서봉 : 조선 시호 문정, 영의정

홍명형 : 조선 시호 의열, 이조참의

홍명구 : 조선 시호 충열, 평안도 관찰사

홍무적 : 조선 시호 충정, 우참찬

홍처량 : 조선 시호 정정, 판중추원사

홍명하 : 조선 영의정

홍중보 : 조선 시호 충익, 우의정

홍처후 : 조선 시호 충장, 공조참판

홍계적 : 조선 시호 충간, 대사헌

홍지해 : 조선 병조판서

홍계희 : 조선 시호 문간, 판중추원사

홍직필 : 조선 시호 문경, 대사헌

홍종응 : 조선 시호 문헌, 이조판서

홍순목조 : 선 시호 문익, 영의정

조선시대에 상신 2, 문형 1, 청백리 3, 부마 1, 공신 3명 등을 배출하였다.

 

 

◎ 남양 (南陽 洪氏)  주요 가계도

 

(시조)은열(洪殷悅) : 초명 (洪儒), 고려 개국공신.

( 2)동주(洪東周) : 아들-() ()

( 3-) 의(洪 毅) : 아들-() ()

( 4-) 호(洪 灝) : 아들-덕승(德升) 덕성(德成)

( 5-)덕승(洪德升)

( 6) 관(洪 灌)

( 7)지유(洪至柔) : 아들-원중(源中) 윤서(倫敘) ()

 

( 8-)원중(洪源中)

( 9)사윤(洪斯胤) : 아들-() ()

 

(10- 진(洪 縉)

 (11) 규(洪 奎) : 첨의중찬, 고려 충혜왕의 모후 명덕태후의 아버지

 (12) 융(洪 戎) : 삼사사, 아들-() 언박(彦博) 언유(彦猷) 언수(彦修)

 (13-) 주(洪 澍)

 (14) 징(洪 徵)

 (15)상부(洪尙溥)

 (16) 지(洪 智) : 사재감직장

 (17)경손(洪敬孫) : 첨지중추부사

 (18)윤덕(洪潤德) : 봉상시부정

 (19)계정(洪係貞) : 예문관대교

 (20)춘경(洪春卿) : 이조참의, 황해도관찰사, 아들-천민(天民) 일민(逸民) 성민(聖民)

 

(21-)천민(洪天民)

 (22)서봉(洪瑞鳳) : 대제학, 영의정, 문정공

 

(21-)성민(洪聖民) : 대제학, 호조판서, 문정공

 (22)서익(洪瑞翼) : 병조참의, 아들-명구(命耈) 명하(命夏)

 (23-)명구(洪命耈) : 평안도관찰사

 (24)중보(洪重普) : 우의정, 충익공, 아들-득기(得箕) 득우(得禹) 득주(得周)

 (25-)득우(洪得禹) : 강원도관찰사

 (26)치중(洪致中) : 영의정, 충간공

 (27)제유(洪濟猷) : 참봉

 (28)익빈(洪益彬) : 부사, 아들-상윤(相胤) 상찬(相纘)

 (29)상윤(洪相胤) :

 (30)원섭(洪元燮) : 참의, 아들-현규(顯圭) 집규(集圭) 승규(勝圭) 치규(穉圭)

 (31-)현규(顯圭) :

 (32)종원(洪鍾遠) : 부호군, 아들-순경(淳敬) 순목(淳穆)

 (33-)순목(洪淳穆) : 영의정, 문익공, 아들-만식(萬植) 영식(英植)

 (34-)영식(洪英植) : 우의정, 갑신정변의 주역

 

 (23-)명하(洪命夏) : 영의정, 문간공

 

(10-) 예(洪 裔)

 (11)자번(洪子藩) : 아들-() ()

 

(12-) 경(洪 敬) : 아들-승서(承緖) 승찬(承讚) 승열(承烈) 승조(承祚) 승연(承演)

 

(12-) 순(洪 順) : 아들-운수(云遂) 운형(云衡)

 (13-)운수(洪云遂)

 (14)유룡(洪有龍)

 (15)덕보(洪德輔)

 (16) 심(洪 深) : 한성부윤

 (17) 응(洪 應) : 좌의정, 익성부원군, 충정공

 

( 8-)윤서(洪倫敘)

 ( 9)연포(洪延浦)

 (10) 용(洪 容)

 (11)제년(洪濟年)

 (12)윤성(洪允成) : 영의정, 인산부원군, 위평공

 (13) 진(洪 珍)

 

( 8-) 연(洪 演)

 ( 9)성윤(洪成胤)

 (10)세진(洪世璡)

 (11) 정(洪 淀)

 (12)정증(洪廷鄫)

 (13)우평(洪禹平)

 

 이 밖에 좌의정 달손, 경래, 범도장군 등이 남양 홍씨 당계이다.

 

  

7. 남양 (南陽 洪氏세계도 

 

 

 

 

 

 

 

 

 

 

 

 

 

 

 

은열

 

 

 

 

 

 

 

 

 

 

 

 

 

 

 

 

 

 

 

 

 

 

 

 

 

 

 

 

 

 

 

 

 

 

 

 

 

 

 

 

 

 

 

 

 

덕성

德成

 

 

 

 

 

 

 

 

 

 

 

 

 

 

 

 

 

 

 

 

 

 

 

 

 

 

  

 

 

 

 

 

 

 

 

 

 

 

 

 

 

 

 

 

 

 

 

 

 

 

 

 

 

 

 

 

 

 

성윤

成胤

 

 

 

 

 

 

 

 

 

 

 

 

 

세진

世璡

 

 

 

 

 

 

 

 

 

 

 

 

 

 

 

 

 

 

 

 

자번

子藩

 

 

 

十一世

 

 

 

정증

 

 

 

 

 

 

 

 

十二世

 

 

 

우평

禹平

  

운형

云衡

운수 

云遂

승연 

承演

승조 

承祚

승열

承烈

승찬 

承讚

승서

承緖

언수

彦修

언유

彦猷

언박

彦博

十三世

재신공파

宰臣公派

예사공파

禮史公派

중량장파

中郞將派

사간공파

司諫公派

당성군파

唐成君派

익산군파

益山君派

선공

감령공파

繕工

監令公派

상서공파

尙書公派

시랑공파

侍郞公派

시중공파

侍中公派

대언공파

代言公派

판중추공파  

判中樞公派

판밀직공파

判密直公派

문정 공 파

文正公派



8. 남양 홍씨(南陽 洪氏) 항렬표(行列表)

 

당홍계(唐洪系)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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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홍계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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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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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공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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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군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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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별 항렬표(宗派別 行列表)

재신공파

(宰臣公派)

南陽洪氏

토홍(土洪)

豊山洪氏

洪州洪氏

22

 

 

 

 

 

23

 

 

 

 

 

24

 

 

 

 

일어날기

 

25

 

 

 

넉넉할유

 

주석석

 

 

종종

26

 

 

 

생각할사

 

길영

 

순박할순

27

 

 

 

착할선

뿌리근

 

28

 

 

 

받들승

은혜은

 

29

잡을병

 

복기

 

화할화

 

흘규

 

30

?을수

불꽃섭

 

얼굴용

 

솥규현

순박할순

31

도울우

실을재

 

가르칠교

 

강이름수

 

심을식

32

공경할흠

경할호

 

솥귀현

 

잡을병

 

빛날희

33

 

못연

. 

 

근원원

생각할사

 

고를균

34

뿌리근

. 

 

기둥주

 

고를균

 

솥규현

35

 

법헌

 

 

빛날희

 

착할선

 

길영

36

 

흘규

 

 

대세

 

근원원

 

잡을병

37

 

 

 

 

올래

 

세찰열

38

 

 

 

 

세찰열

 

터기

39

 

 

 

 

진압할진

40

 

 

 

 

 

못택

41

 

 

 

 

 

뿌리근

42

 

 

 

 

 

밝을소

43

 

 

 

 

 

홀규

44

 

 

 

 

 

45

 

 

 

 

 



9. 남양 홍씨(南陽 洪氏) 인구수(人口數)

 

통계청의하면 2000년에는 총 117,638가구 379,708명으로 조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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