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 맹씨(新昌孟氏) 맹씨행단 홈으로 이동

1> 시조 : 맹 가[孟 軻 : 맹자]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신창(新昌)은 충남 아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굴직현을 신라 경덕왕이
기량현으로 고치고 고려초에는 신창현으로 그후 조선조에서는 온창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아산군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에 신창면이 있다.

맹씨(孟氏)는 중국 평릉에 연원을 두고, 춘추시대 제나라 15대 임금인 환공(桓公)의 아들
경부(慶父)의 호가 맹손(孟孫) 이라서 맹(孟)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하며,
맹자(孟子)로부터 세계가 이어진다.

기원전 372년경 추(趨)에서 태어난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어릴 때 현모 장씨의 밑에서 자라면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아들의 면학을 위하여 세 번을 이사함)>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으며 짜던 베틀의 씨날을
칼로 자름)>의 유명한 고사를 남겼다.

우리나라 맹씨는 맹자(孟子)의 40세손 맹승훈(孟承訓)이 888년(신라 진성왕 2) 당나라
한림원의 오경박사(五經博士)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경전을 가지고 동래(東來)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하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맹씨의 본관은 신창을 비롯하여 온양, 파주, 양주, 청주,안읍, 천안, 전주등 3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신창과 온양을 제외한 관향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고려 충렬왕때 예부시랑을 거쳐 예부전서에 오른 맹의(孟義)를 1세조
계대하고 있다. 당대에 학자로서도 유명했던 의(儀)는 충선왕때 신창백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신창으로 하게 되었다.

신창맹씨의 역대 인물을 살펴보면 1세조 의(儀)의 아들 유(裕)가 고려에 이부상서와
순창군수를 역임했고, 유의 아들 희도(希道)는 공민왕때 한림어사, 한성윤 등을 지내며
공양왕때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희도(希道)의 아들이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상으로
손꼽히는 고불(古佛) 사성(思誠)이다.
고려말의 명장 최영의 손녀사위 이기도한 그는 청백하여 정승의 벼슬 에서도 권세를 철저히
배제했고, 나들이때는 소를타고나가 보는 이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오갈때에 관가에 들리지 않고 간소한 행차를 하였는데,
어느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렸더니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
그가 하인더러 이르기를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하인이 돌아와 고하니 두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밑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

[연려실기술] [세종조상신편]에 보면 그에 대한 유명한 <공당문답>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그가 온양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 여원(旅院)에 들렸더니,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그는 아래층에 앉았었다. 누상에 있는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서 의정부 녹사 시험에 응하러 가는자였다.
그 선비는 맹정승을 보고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맹정승이 먼저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하였더니,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다시 "무슨 벼슬인공"하니 "녹사 시험보러 간당" 하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하니
그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하였다.

후일 맹정승이 의정부에 앉아있는데 그사람이시험을 치러 들어왔다.
그사람은 눈앞의 정승이 전날에 장기를 두며 농담하던 그 노인인줄알지 못했으나 맹정승은
그를 알아보고 "어떠한공" 하니, 그사람이 비로서 깨닫고 말하기를"죽었지당"하니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김으로 맹정승이 그까닭을 애기하자 모든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리하여 그사람을 녹사로 삼았고, 맹정승의 추천으로 여러 차례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맹정승은 죽어서 남긴것이 한자루의 피리뿐이었다고 하며,
유명한 황희 정승과 함께 후세의 신망받는 명상으로 일컬어졌다.

신창맹씨는 1960년 국세조사 당시 11,000명, 1975년에는 2,928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926가구, 16,4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남 아산군 배방면 중리, 수철리, 휴대리

함남 북청군 청해면 어포리

황해도 신계군 사지면 태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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