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홍씨 (豊山 洪氏)

1> 시조 : 홍지경[洪之慶]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안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하지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영안으로 고쳐서 예천군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때 풍산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은 안동군 풍산읍으로 남아있다.

 풍산홍씨(豊山洪氏)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을
역임한 후 풍산에 정착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며
고려말에서 조선 헌종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세도가문으로 명성을 날렸다.
지경의 아들 홍애(洪崖) 간(侃)은 첨의사인(僉議舍人)과 지제고(知制誥)에 올랐으나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바른말을 하여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졸(卒)하였다.

 3세 유(侑)는 진현관, 보문각, 춘추관대제학에 올랐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5세 구(龜)는 승의교위 낭장을 지냈으며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으로 하향 도중에 지금의 고양군 벽제 성석리에 정착하여 그후로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6세 만은(萬隱) 재(載)는 소윤(少尹), 군사(郡事), 양관대제학을 역임했으며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12세 응복(應福)의 아들 천경(千璟)은 한림(翰林)에 재직시 김연흥의 옥사와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뒤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올랐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 수(脩)의 아들 모당(慕堂) 이상(履祥)은 경상, 경기관찰사,
개성유수와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한사람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에 충실한 [이상]은 소학(小學)을
학문과 교육의 기본으로 삼아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가례(家禮)대로 실행하였으며,
[걸군소(乞郡疎)]에 나타나듯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슬하에 여섯아들과 열한명의 손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하였다.

 장자인 방(露)은 도관찰사와 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지계예설(芝溪禮設)과 선조에 제사하는 의식과 법도를 저술하였다.
 둘째 아들 립(露)은 가선대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셋째 집(露)은 사헌부장령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넷째 영(霙)은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고 인조23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다섯째 박(露)은 수운판관을 역임,
여섯째 탁(露)은 통정대부 남원부사로 영국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증직되어 풍산홍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숙종때 학자로 이름난 예조참의 주국(柱國)의 아들 만선(萬選)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행실이 근엄하고 인격이 고매하여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 세인들은 그를 (完人)이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農藝), 의약(醫藥), 구황(救荒)에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사상에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 서유구 등의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영조때 판돈령부사에 오른 만조(萬朝)는 일찍이 대사간,
좌빈객 등을 거쳐 7도관찰사와 2도안찰사를 역임, 우참찬, 형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때 대사간을 지낸 만용(萬容)은 영안위 주원(柱元)의 아들로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1754년(영조31)에 예조판서가 된 상한(象漢)은 병조판서, 판돈령부사를 거쳐 1759년
판의금부사로서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 봉한(鳳漢)은 영조때 예조판서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로, 그의딸이 혜경궁 홍씨로
유명하며, 영조때에 많은 업적을 남긴후 조선후기의 문화 부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동생 인한(麟漢)도 형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정조때 대제학을 지낸 국영(國英)과 지돈령부사 현주(顯周)가 뛰어났고,
우부승지 인모의 아들 석주(奭周)는 특히 성리학에 밝았고 문장에 있어서 [십대가(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한말에 와서는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범식(範植)과,
독립운동에 몸바친 충희(忠熹)가 뛰어났고, 진(震)은 통일 독립정부수립을 위한 비상국민의회
의장으로 추대되어 명망높은 풍산홍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홍씨(豊山洪氏)는 남한에 총 8,323가구,
35,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북 중원군 노은면 일원

전남 나주군 일원

충남 천원군 일원

경기도 고양군 일원

경남 진양군 일원

경남 양산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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